국왕이 능행(陵幸)한 뒤 특별 하교에 따라 시행하던 과시(科試)이다.
서총대(瑞蔥臺)는 연산군이 창경궁(昌慶宮)과 창덕궁(昌德宮) 경계의 후원(後苑)에 돌을 쌓아 만든 대(臺)로,
1,000명이나 앉을 수 있는 넓이였으며, 그 아래에는 못을 파고 옆에는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중종이 즉위한 뒤에 서총대를 철거하였는데, 당시 서총대는 현재의 창덕궁 영화당(暎花堂)과 창경궁 춘당지(春塘池) 사이에 있었다.
서총대가 철거된 뒤에도 그 터를 서총대라고 부르고 그 자리에서 잔치를 베풀거나 과시를 시행하였다.
특히 명종 이후로는 서총대가 유생(儒生)에게 제술(製述) 시험을 보이거나 무사(武士)들에게 기예(技藝)를 시험 보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대전통편』과 『전율통보』에는 서총대시사가 수록되어 있지 않으나, 『만기요람』과 『은대편고』 등에 서총대시사가 수록되어 있다.
『만기요람』에는 용호영(龍虎營)과 삼군문(三軍門)마다 각각 ‘시예(試藝)’ 항목에 서총대시사를 수록하고 있는데, 각 군문마다 응시 대상이 달랐다.
시험 과목은 각 군문마다 다르고 같은 군문 안에서도 응시 대상에 따라 달랐는데,
장막군(帳幕軍)을 조총으로 시취하는 것을 제외하면 대체로 유엽전(柳葉箭)과 편전(片箭)이 공통 과목이었다.
서총대시사의 성적이 우수한 사람에게는 한량(閑良)이면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주고 출신(出身)이면 가자(加資)하였으며,
그 외에는 포목(布木), 통전(筒箭), 통개(筒箇), 호피(虎皮), 표피(豹皮) 등의 물품으로 시상하였다.
[근간] 이강욱, 『조선후기 양반제도』 제4편 양반의 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