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江華)의 군관(軍官)으로 조직한 부대로, 장려군관(壯旅軍官)이라고도 하였다.
강화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인데도 군역(軍役)을 면제받은 군관과 교생(校生)이 많았다.
그에 따라 그들 중 군관을 모아 조직한 부대가 장려이고, 교생을 모아 조직한 부대가 의려(義旅)이다.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 「병전(兵典)」 〈군제(軍制)〉에서는 강화의 장려와 의려가 창설된 시기를 정유년이라고 하였으나,
『승정원일기』 정조 3년 4월 11일에 강화유수(江華留守) 홍낙순(洪樂純)이 올린 상소에서는
강화의 장려와 의려는 이선(李選)이 강화유수로 있던 신유년에 창설하였다고 하였다.
이선이 강화유수로 있던 신유년은 숙종 7년(1681)이고, 사료에서 강화의 장려와 의려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숙종 16년(1690) 이후인 점으로 보아 『신보수교집록』에서 정유년이라고 한 것은 신유년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신보수교집록』 「병전」 〈도시(都試)〉에서는 숙종 27년(1701)부터 강화의 장려와 의려를 대상으로 도시(都試)를 시행하기 시작였다고 하였다.
『신보수교집록』과 『은대편고』에서는 강화의 장려와 의려를 대상으로 도시를 시행한다고 하였으나,
『대전통편』과 『전율통보』에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시재(試才)를 시행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