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江華)의 무학(武學) 중에서 별도로 선발하여 조직한 부대로, 무려군관(武旅軍官)이라고도 하였다.
강화에는 원군(原軍)으로 무학과 속오(束伍)가 있었고 군관(軍官)으로 장려(壯旅)와 의려(義旅)가 있었는데,
무학과 속오가 장려와 의려로 편입되어 원군이 줄어드는 폐단이 생겼다.
그러자 정조 3년(1779)에 강화유수(江華留守) 홍낙순(洪樂純)이 상소하여 이러한 폐단을 지적하고
무학 중에서 300명을 별도로 선발하여 장려와 의려처럼 무려군관이라고 할 것을 청하여 받아들여졌다.
『은대편고』에서는 강화의 무려를 대상으로 도시(都試)를 시행한다고 하였으나,
『대전통편』과 『전율통보』에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시재(試才)를 시행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