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사료와 법전에 사용된 초선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필요한 사람을 선발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였다.
유능한 인재, 적합한 관원, 용맹한 군병, 독서당(讀書堂)의 문관, 청백리(淸白吏) 등의 선발을 초선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는 경연관(經筵官)이나 서연관(書筵官)에 적합한 사람을 선발하는 것 또는 그렇게 선발된 사람을 가리켰다.
그중 후자의 의미로 사용된 초선은 조선후기부터 출현한다.
인조반정 이후 오윤겸(吳允謙)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서울과 지방의 유학(幼學) 중 재능과 행실이 뛰어난 사람을 수소문하여 뽑아서 재가받은 뒤
유학초선(幼學抄選)이라는 이름을 붙여 음관(蔭官)으로서의 재능이 있는 생원(生員)·진사(進士)와 함께 관직에 의망(擬望)하도록 하였다.
이때의 초선은 유학(幼學) 중 인재를 선발하던 제도이고 아직 경연관이나 서연관에 적합한 사람을 선발하는 제도가 아니었으나
이 제도가 그러한 제도의 출발점이 되었다.
숙종 때에는 경전(經典)에 밝고 행실이 뛰어나 경연관이나 서연관에 적합한 선비를 선발하는 것 또는 그렇게 선발된 사람을 초선이라 하였고,
초선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3품 찬선(贊善), 정4품 진선(進善), 정7품 자의(諮議), 성균관의 정3품 좨주(祭酒), 정4품 사업(司業),
사헌부의 종3품 집의(執義), 정4품 장령(掌令), 정5품 지평(持平) 등의 관직에 제수하였다.
영조 이후의 사료와 법전에는 초선을 남대(南臺)와 함께 거론한 사례가 자주 보이는데 이 둘은 구별이 필요하다.
김상로(金尙魯)는 ‘음관 중 명망과 기풍이 있는 사람을 대관(臺官)에 의망하는 것은 남대라 하고,
산림(山林)에서 학문을 닦은 선비를 대관에 의망하는 것은 초선이라 합니다.’라고 하였다.
초선이나 남대 모두 이조에서 대관에 의망한다는 점은 같았으나,
남대는 이미 벼슬에 나온 명망이 있는 음관 중에서 선발하고 초선은 아직 벼슬에 나오지 않은 재야의 학자 중에서 선발한다는 점이 다르다고 구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영조 23년(1747) 8월 22일에 개정되었다.
영조가 차대(次對)의 자리에서 ‘앞으로는 경연관을 새로 뽑을 때 대신(大臣)과 이조의 당상이 빈청(賓廳)에 모여 이름을 써서 들이고,
초선으로 한번 선발되고 난 뒤에는 그 다음 순서로 남대에 의망하라. 이렇게 정식을 삼되,
다시는 전조(銓曹)의 관원 한 사람의 의견만으로 남대에 의망하지 말게 하고 선발된 사람은 계속 초선으로 두어서 유림(儒林)을 중시하는 뜻을 보여주라.
그리고 자의(諮議)에 의망할 때에는 반드시 초선 중에서 의망하는 것도 정식을 삼아 시행하라.’라고 전교(傳敎)를 내렸다.
이 전교로 인해 바뀐 제도를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이조에서 독자적으로 초선하던 제도를 대신과 이조의 당상이 회의하여 초선하도록 바꾸었다.
둘째는 이조가 독자적으로 남대에 의망하던 제도를 대신과 회의하여 초선한 사람으로 의망하도록 바꾸었다.
셋째는 세자시강원의 자의(諮議) 자리를 초선 중에서 의망하는 자리로 지정하도록 바꾸었다.
이는 경연관과 서연관으로 적합한 사람을 공정하게 선발하고
그렇게 선발된 사람이 관계에 진출할 수 있는 경로를 특정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정해진 규정은 이후 『대전통편(大典通編)』 「이전(吏典)」 〈천거(薦擧)〉에 수록되었다.